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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소식

닉슨 쇼크 그리고 트럼프 쇼크...그들의 평행이론

제1, 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막대한 금과 유럽 각국의 채권을 보유한 초강대국 지위에 오릅니다. 반면 세계대전 이전 패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채무국가가 되죠.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 44개 나라에서 온 대표 730명이 모여 새로운 통화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논의했고 브레튼 우즈 협약을 맺습니다. 그 내용은 파운드를 대체해 달러가 기축통화의 역할을 하고, 금 1온스와 35달러를  동급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합의한 것입니다. 사실 영국은 이때 케인스를 필두로 새로운 국제 통화 방코르(Bancor)를 만들어 사전 발행한도를 정해 글로벌 기축통화로 사용하자고 제안했었습니다. 사실상 금본위제를 대체하여 변동성이 거의 없는 고정환율로 각국 화폐를 연동시키자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미국 대표인 해리 화이트에게 손을 들어주었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인정했습니다. '달러-금환본위제'의 서막이 시작된 것입니다. 

Bretton Woods Conference

 

1947년을 기준으로 미국 정부는 전세계의 금보유고 가운데 70%를 가지고 있었고, 마셜플랜의 유럽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은 2차세계대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미국산 제품을 소비하며 달러를 기축통화로 활용함으로써 브레튼 우즈 체제는 잘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1950년부터 1969년 사이 서독과 일본이 성장하며 미국이 세계의 경제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에서 27%까지 떨어졌습니다. 또한 1960년대 린든 B. 존슨 행정부는 '위대한 사회' 계획으로 인한 복지지출 증액, 소련과의 냉전을 위한 군비확충, 베트남 전쟁 전비 조달을 위해 늘어난 국가채무, 국제수지 적자 등으로 달러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1959년 벨기에 출신 경제학자이자 예일대 교수 로버트 트레핀이 미국 의회에서 '기축통화인 달러가 가진 모순'을 주제로 발표를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트레핀의 딜레마
기축통화는 널리 퍼지고 사용되어야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그렇기 위해서는 공급되는 통화의 양이 많아야 한다. 하지마나 발행양이 증가하면 발행국가는 무역적자가 발생한다. 반대로 발행 양을 줄이게 되면 유동성 부족으로 세계 무역은 위축될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미국의 달러 공급이 늘어나게 되면 세계 무역은 활발히 진행되지만 이를 위해 재화를 수입하는 미국은 무역 적자가 지속되어 늘어난 달러의 양만큼 통화 가치 하락이 이어진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달러의 신뢰도가 하락하여 각 국가가 보유한 달러 자산은 자연스럽게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결국 이런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현재 운용 중인 금본위 제도하의 고정환율제도는 조만간 무너지게 된다. 

 

Robert Triffin

 

달러가치의 하락을 우려한 각국의 정치인들은 발행된 달러의 양이 미국정부가 가지고 있는 금보다 많아질 경우 자국이 보유한 달러가 금으로 태환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빠집니다. 

1965년 2월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 골은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금과 공식적인 환율로 바꿀 의향을 밝혔습니다. 미국은 브레튼 우즈 체제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금으로 교환을 해줍니다. 그러자 유럽 각 국들 모두 너도나도 금으로 태환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1966년까지 미국 정부가 보유한 금은 132억 달러였고, 이중 해외 금 태환에 대응 가능한 금의 규모는 약 32억달러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이 보유한 달러의 규모는 140억 달러였습니다. 사실상 금 태환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미국 정부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 달러 발행을 10% 더 늘렸습니다. 결국 서독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떠나겠다고 공헌했고, 스위스와 프랑스는 금 태환을 시작했습니다. 

 

1971년 8월 13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6명의 관료들과 비밀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였고 8월 15일 "평화의 도전"이란 제목으로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특보를 통해 이제 미국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 주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President Richard Nixon announcing a series of economic measures on August 15, 1971. AP Photo/HWG.


1971년 당시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5.84%였으며, 8월 기준으로 실업율은 6.1%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맞서기 위해 닉슨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아서 F. 번스와 재무부 장관 존 코널리, 재무부의 국제담당재무국장 폴 볼커와 논의를 합니다. 1971년 8월 13일 오후에 닉슨과 백악관 및 재무부의 고위 자문역들은 캠프데이비드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습니다. 닉슨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에 관한 큰 논의가 있었고, 존 코널리의 조언에 크게 의지하던 닉슨은 달러와 금 사이의 태환 제도를 중지함으로써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잠재적인 물가 상승 영향을 억제하기 위해 임금과 가격을 90일동안 동결하고, 달러의 부족을 막고 미국 경제를 안정시키며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떨어뜨리기 위해 수입품에 10%의 수입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미국 정부가 임금과 가격을 통제한 것입니다. 닉슨은 8월 15일 일요일에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합니다.

닉슨이 취한 조치들은 미국내에서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연설 하루 뒤인 월요일에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일일 사상 최대 상승폭인 33포인트가 올랐고, 《뉴욕 타임스》에는 닉슨이 취한 대담함에 망설임 없이 갈채를 보낸다는 사설이 실렸습니다. 12월에는 스미소니언 협정에 따라 G10 통화들의 절상으로 수입 과징금이 철폐되고, 1973년 3월에는 고정 환율제가 변동 환율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1976년 IMF는 변동 환율제를 승인했습니다. 

 

닉슨은 서독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미국 달러 대비 자국 통화 가치를 높이지 않는 한 무역 보호주의로 회귀하겠다고 사실상 위협했습니다. 존 코널리 미국 재무장관은 다른 G10 국가들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당신들의 문제"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John Bowden Connally Jr.

 

 

닉슨 충격의 영향으로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과 변동 환율제의 불안정한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에 달러의 가치는 ⅓가량 떨어졌으며 마르크는 1971년 5월에 변동 환율이 된 뒤로 가치가 상당히 올랐습니다. 또한 일본은행은 엔화의 가치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외환 시장에 크게 개입해야 했습니다. 1971년 8월 16일과 8월 17일 사이에 일본은행은 달러의 가치 하락을 막고 엔화와의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13억 달러를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행의 대형 개입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엔화 대비 약세를 보였습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일어난 일이라서 세계 경제도 혼란을 겪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금과 달러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림으로써 그간 금 교환권이라고 믿어 온 달러와 그 달러에 연동되어 있었던 전 세계 화폐가 혹시나 종잇조각이 되지 않나 하는 우려를 가져왔기 때문이죠. 동시에 미국 정부는 모든 수입품의 관세를 10% 올리는 보호무역을 단행하고 국내적으로는 90일간 물가와 임금을 동결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달러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여 목표 금값을 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스미소니언 협정, 미국 달러를 실질적으로 8.57% 평가절하)로 변경했습니다.


전세계의 물가와 원유의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고 이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경제 성장률이 하락했습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도 당연히 영향을 받았는데 1971년 3분기 11.3%였던 경제성장률이 같은 해 4분기에는 6%, 1972년 1분기 5.3%까지 하락하는 등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2011년에 폴 볼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습니다. 볼커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며, 유럽은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없었고 자신들만의 통화를 만들었지만 현재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1996년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닉슨 충격 이후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오늘날의 세계 통화 제도에서 금은 어떠한 특별한 지위도 갖고 있지 않다. 연방준비제도는 달러를 그 어떤 것과도 고정해야할 의무가 없다. 연방준비제도는 적절하다고 여기는 만큼 많이 또는 적게 돈을 만들 수 있다. 그러한 자유로운 제도에는 큰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연방준비제도는 실재하거나 임박한 경기 후퇴에 돈을 공급함으로서 대응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자면 그 유동성으로 인해 (검은 목요일이 일으켰던 모든 무서운 것들을 일으킨) 검은 월요일에서 실물 경제의 침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변동 환율 통화는 이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도 갖고 있다. 한 예로, 변동 환율제는 세계 무역상들과 투자자들에게 불확실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난 5년동안 달러는 많게는 120엔에서 적게는 80엔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이 변동성의 비용은 (복잡한 금융 시장은 사업체들이 변동성으로 인한 위험을 없앨 수 있게 하는 점도 있어서) 측정하기 어렵지만 상당할 것이다. 더욱이 자산 전문가들이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는 그들이 동시에 무책임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며, 몇몇 나라에서는 이미 그들이 그러한 기회를 재빨리 얻었다.

 

오늘 이렇게 닉슨 쇼크를 다루는 이유는 닉슨과 트럼프의 평행이론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본 요원과 생각이 통하는 논설이 있어 아래에 소개합니다. 글로벌 이코노믹 연구소장이신 김대호 박사님의 글입니다. 

'미치광이 전략'이라는 말이 있다. 의도적으로 미친 척 행동함으로써 상대를 혼란에 빠트리고 그 틈을 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전략이다. 국제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학문 용어다. 미치광이 전략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인물은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고(故) 헨리 키신저 박사다.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외교안보 고문역을 하면서 그로 하여금 중국과 수교하도록 만든 유명한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거(영어: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였다. 1923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탄버그에 있는 캠프 크로프트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전후 하버드대에 진학해 문학 학사와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은 '복원된 세계: 메테르니히, 로버트 스튜어트와 평화의 문제들'이다. 국제 관계론의 근대 현실주의 학교를 창립한 한스 J. 모건소가 그의 스승이다. 키신저는 1969~1977년 미국 외교정책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시기 닉슨 대통령을 보좌하며 미국과 소련 간 데탕트 정책을 개척했다. 중국의 "개방"을 이끈 1972년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도 그의 작품이다. 1973년 베트남 종전 등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요즘 세계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폭탄으로 아비규환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치광이 전략으로 뉴욕증시를 비롯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뉴욕증시뿐 아니라 달러환율·국채금리·국제유가·금값 그리고 비트코인·이더리움·리플 등 가상 암호화폐도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는 2015년 '불구가 된 미국'이라는 책을 발간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무슨 행동을 할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나는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상대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미치광이 행보가 고도로 계산된 협상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미치광이 전략은 상대가 정상인이라는 가정하에 자신이 광인처럼 행동하는 전략이다. 그래서 외교 상대가 상식적이지 않을 경우, 즉 똑같이 미친 놈이라면 전혀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전쟁까지 가고 마는 역풍이 불기도 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전쟁을 피한답시고 도발하며 상대방을 약 올리다가 되레 상대방의 뚜껑이 열려서 선전포고를 받고 전쟁이 시작된 사례가 적지 않다.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은 닉슨-키신저와 많이 닮았다. 닮은 정도를 넘어 아주 판박이이다.

닉슨이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지쳐 있었다. 국민들의 피로감이 높았고, 경제적으로 인플레이션과 무역적자가 누적됐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강력한 부상이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에 균열을 내던 시기였다. 미국의 국력이 완연한 쇠퇴기였을 때 닉슨은 ‘베트남 철군’ 공약을 내걸고 미국의 안정을 원하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 유권자를 파고들어 대선에서 승리했다. 트럼프 역시 천문학적 규모의 무역적자에 인플레이션이 치솟는 등 미국 경제가 추락하던 시점에, 또 신흥 패권국 중국이 미국에 강력한 위협 세력으로 떠오르며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가 위태로웠을 때 등장했다. 트럼프는 미국의 힘이 쇠락해진 시점에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걸고 저소득·저학력 백인 남성 중심의 ‘침묵하는 다수’를 자극해 지지층을 다졌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닉슨과 트럼프는 대내외 정책 면에서도 맞닿아 있다. 닉슨은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1972년 베트남 파병 미군 50만여 명의 철수 결정을 내렸다. 주한미군 7사단도 철수시켰다. 트럼프의 ‘안보 무임승차론’이 이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이미 한국을 향해서도 ‘머니 머신’(부자 나라)이라 부르며 방위비 증액을 압박해 왔다. 트럼프는 ‘동맹 중시’ 기조 대신 동맹국이라도 거센 위협을 가해 자국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트럼프의 대중국 전략은 닉슨이 미·소 냉전 구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미·중 화해 드라이브를 걸었던 ‘키신저(당시 국무장관) 전략’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신흥 패권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신냉전 체제를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역(逆)키신저 전략’이다.

트럼프 관세 폭탄의 뿌리도 닉슨에 있다. 닉슨은 1971년 달러 중심의 금본위제도인 브레턴우즈 체제를 끝내겠다고 발표해 이른바 ‘닉슨 쇼크’를 불렀다. 당시 달러 보호와 무역수지 개선을 이유로 ‘보편관세 10%’란 초강수를 뒀다. 경쟁국의 통화 가치 절상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다. 닉슨의 조치는 공식적으로 브레턴우즈 체제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으나 브레턴우즈 체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를 중지시키면서 체제를 사실상 무너뜨렸다. 닉슨은 브레턴우즈 체제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달러의 금태환 제도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으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973년에 이르러 브레턴우즈 체제는 사실상 변동 환율 불환 제도로 대체됐다. 닉슨 쇼크는 결국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트럼프와 닉슨의 평행이론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가치관과 철학을 공유해왔다. 1982년 36세의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트럼프가 69세 닉슨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트럼프와 닉슨은 11년간(1982~1993)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1982년 첫 편지에서 트럼프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닉슨에게 "그때 만나서 영광이었다"고 적었다. 닉슨은 트럼프에게 "앞으로 (가치 있는) 조언을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화답했다. 둘은 미식축구·부동산·베트남전쟁·미디어 전략 등을 주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닉슨은 트럼프가 인수했던 뉴저지 제너럴스 풋볼팀을 어떻게 다룰지도 조언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2020년 일반에 공개됐다. 리처드 닉슨 재단의 수석 부사장인 짐 바이런은 AP통신에 "편지들은 자료 4600만 장, 사진 30만 장 등이 포함된 기록 보관소에서 2년간 연구를 통해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 편지는 트럼프에게 닉슨이 어떤 영향을 줬는지 잘 보여준다. 편지뿐만이 아니다. 둘은 수시로 만나 정보와 비전을 공유했다. 정치적 동지였던 것이다. 닉슨은 처음부터 트럼프가 정치가로 성공할 거라고 예견했다. 1987년 12월 당시 41세 사업가였던 트럼프에게 닉슨은 대선 출마를 권유하는 듯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는 "내 아내가 트럼프 당신이 ‘도나휴 쇼’(MSNBC의 유명 토크쇼)에서 대단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출마 결심만 하면 당선될 것이라고 했다"고 적었다. 닉슨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실상의 스승이다. 닉슨을 공부하면 트럼프 관세 폭탄의 본질과 향후 행보도 예측해볼 수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